산중의 암자를 두고 달마도를 수행 방편 삼아 세속의 역(驛)을 전전하고 있다. 붓과 먹,걸망에 짊어지고 서울의 삼각지역에서 부산역 지하상가로 옮겨온 지 스무날 남짓이다. 역은 떠남이자 도착이다. 출발이면서,또한 닿아서는 이내 다시 버리고 떠나야 할 공간이다. 삶 또한 떠남과 닿음의 쉼 없는 윤회여서 인생살이는 역전에 기대어 섰을 때 그 핍진한 진면목을 보여준다.

쉼 없는 삶의 윤회를 찰나적 영상으로 페이지 넘기는 곳이 역전이다. 길 떠나는 이들과 길 찾아온 손들이 옷깃 스치며 인연의 보따리를 풀어놓는다. 하지만 떠나지도,찾지도 못한 채 다만 머무르는 이들도 있다. 길에다 육신을 누인 노숙자(路宿者)들이다. 인생의 막장 같은 부산역에서 그들은 다시 떠나기를,보다 나은 삶에의 희망을 남 몰래 저울질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의 육신을 빌려 태어났기에 업 따라 실패와 좌절을 겪는 것은 피할 수 없는 노릇이다. 실패와 좌절의 업은 극복의 몸부림을 통해 수행의 발심을 드러낸다. 수행은 멀고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일상의 저잣거리 곳곳이 수행처다. 무보시로 달마도를 그려주는 것은 업에 짓눌린 이들에게 희망을 나누기 위함이다.

설이 다가온다. 하지만 올해도 우울한 설을 예고하고 있다. 양극화의 칼바람은 더욱 매섭고 사나워졌다. 통계청이 발표한 '2006년 연간 가계수지동향'을 보면 양극화가 단순한 추상명사가 아님을 보여준다. 소득 상위 20%가 월평균 634만원을 벌었다면 하위 20%는 83만원을 버는 데 그쳐 상·하위 20%의 격차가 7.64배나 된다. 직장인 45.5%가 설 상여금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설문조사도 나오는 등 스산한 풍문들이 겨울 역전을 배회하고 있다.

다시 달마도를 꺼내든다. 달마도는 어느날 갑자기 내게 찾아왔다. 한때 많은 신도를 거느렸고 얄팍한 지식으로 겁 없이 법문을 입에 올리기도 했지만 수행자로서의 방황과 갈등은 계속되기만 했다. 그럴 즈음 어느 불행한 망자를 위해 무보시로 천도재를 올렸다. 안타깝게 이승을 하직한 망자의 혼을 달래다 유품 속 붓을 발견했고 잠깐의 경계를 오가다 달마도를 그리는 희한한 인연을 만났다.

달마도를 가운데 놓고 숱한 이들을 만났다. 가정사 세상사에 시달리는 온갖 사연들을 만났고,그 사연들만큼이나 구구절절한 달마도가 생겨났다. 길 위에 머무는 달마도 수행도 서원을 세운 10만장이면 그칠 것이다. 이미 5만장에 가까워 오니 수행의 길도 한 고비를 넘은 셈이다.

달마도를 받아들고 나쁜 생각을 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열심히 노력한 뒤 그 대가를 기원할 것이며,스스로를 되돌아보는 기회를 마련해 줄 것이다. 인과응보란 삶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 좋은 생각과 원인을 뿌리면 걸맞은 열매를 맺을 것이며,나쁜 생각과 원인을 뿌리면 괴로움이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달마도는 좋은 생각,좋은 인연 한 자락 심어주는 희망의 씨앗이다.

부산역을 오가며 바라본 구정 세밑 표정이 예사롭지 않다. 머지않아 선물 꾸러미를 들고 환한 얼굴로 고향 찾아가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그런 모습을 부럽게 바라보는 숨은 눈들이 있을 것이다. 설을 설레게 맞이할 수 있는 넉넉한 명절 인심을 기대해 본다.

/ 입력시간: 2007. 02.08. 11:06